[회원기고] 민변 한반도평화위원회 평화교류회 후기 : 푸른 바다 위 놓여진 ‘위안부 추모비’ – 그 옆에 건설되는 제국주의의 상징 / 권용 회원

2025-05-02 18

[민변 한반도평화위원회 평화교류회 후기]

푸른 바다 위 놓여진 ‘위안부 추모비’

– 그 옆에 건설되는 제국주의의 상징 –

 

– 권용 회원

 

민변 가입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신입생에게 농활 제안하듯 한평위의 모 변호사님께서 오키나와로 국제연대 활동을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권유해주셨다. 피지배민족으로서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이 역사 의식을 공유하고,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서 대안을 고민하는 국제연대라니, 그 취지는 의식을 고취시키기 충분했고, 오키나와 본섬에서 남서쪽으로 300km 떨어진 미야코섬의 푸른 바다와 하늘은,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씻어주는 데 더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일정은 금요일부터 2박 3일이었으나 미야코로 향하는 왕복 비행편이 목요일과 월요일에만 운행한다고 하여 3일이나 결근하는 것이 우려되었다. 그럼에도 입사 2개월의 패기는 나를 주저 없이 미야코지마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강화도보다도 작은 미야코섬에 집결한 25인의 교류회 멤버들은 호텔에 모여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 소금박물관, 온천, 습지투어, 카페 등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겨울 내내 각자의 자리에서 윤석열 탄핵과 사회대개혁을 외쳐온 이들은, 다음 날 있을 탄핵심판 선고를 시청하기 위해 낮선 이국의 땅에서 적막하고, 긴장감 가득한 첫날 밤을 보내야 했다..

4월 4일 오전 11시 박삼성, 장경욱 변호사님의 방에 모인 민변과 오키나와의 가토 유타카, 마츠모토 케이타 변호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문형배 재판관이 읽어내리는 2024헌나8 선고를 청취했고 류광옥 변호사님은 그 내용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통역해주었다. 한 사회를 지배했던 독재자가 시스템에 의해 퇴장하는 현장이 국제적으로 함께 공유되고 있었고, 국제연대가 실천되는 또 하나의 현장이었다. 박삼성 위원장은 눈물을 참지 못했고, 가토변호사는 감정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윤석열 정권이 퇴진한 첫날 밤, 한국의 각지에서는 수 많은 이들이 ‘무용담’을 나누며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미야코지마의 호텔에서 열린 평화교류회 대면식에서도 만남의 어색함을 털 새도 없이, 독재를 타도한 이들의 연대기와 오키나와의 새로운 얼굴로 소개된 Onaga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고, 종로 광화문 뒷골목을 연상케 하는 웃음소리가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진행된 세미나에서는 서로 준비해 온 소송 사례와 현안을 발표하며 의견을 나눴다. 오키나와 측에서는 ▲ 제2기 트럼프 행정부가 한일 양국에 미치는 영향, ▲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 문제(헤노코 신기지), ▲ 미야코지마 자위대 기지(보라지구 훈련장), ▲ 택시 운전사가 미군 출신 강도로부터 부상을 입은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 등 지역 현안을 소개했다. 우리의 변호사 운동도 지역에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는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변에서는 ▲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 및 관련 소송 현황을 박삼성 위원장이, ▲ 한반도평화위원회의 활동 경과를, ▲ ‘12·3 계엄령’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현재를 각각 함승용, 류광옥 변호사님이 발표해주셨다.

언어도, 문화도, 사회적 배경도 달랐기에 양측의 메시지가 얼마나 정확히 전달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그러나 동북아 평화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강대국의 패권유지를 위해 본인들의 토지와 자원 등을 빼앗겨 온 피지배 민족의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공유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시무우타 이자카야 키야마’에서 미야코섬의 전통 음악과 춤을 배우며 “간빠이!”를 외치는 밤은 그 자체로 축제였다.

 

교류회의 마지막 날은 보라지구의 훈련장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2010년대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육상자위대가 2021년 4월 개설한 이 보라훈련장은 3기의 탄약고, 사격훈련장, 야외 훈련장이 각 1개씩 주요시설로 포함되어 있는데, 민가로부터 고작 2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주민들의 안전 우려가 끊이지 않았고, 아카미네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법정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라 훈련장이 위치한 부지 중 일부의 소유권이 개인 명의로 되어있는데, 광산회사가 임차하여 그 토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훈련장 건설을 위해 광산회사가 악의의 취득시효를 주장하여 개인 명의의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했고, 법원이 광산회사의 손을 들어 주어 보라 훈련장이 건설되었다. 현재도 일부 토지는 소유권 분쟁 중이며, 이에 맞서 주민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훈련장을 나오는 길, 부대 인근 농가에서 만난 나카자토 세이한 씨는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놓인 미야코섬 주민들의 불안감과, 고향을 지키기 위한 투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여년 전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투쟁하며 수 개월동안 강정 마을에 머문 적이 있었다. 구럼비 바위와 붉은발말똥게를 지키고, 전쟁 속에서 고향을 지키고자 싸웠던 강정의 주민들은 국가의 질서와 세계평화라는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정의(正義)의 이름으로 쏟아지는 폭력과 국가배상금을 노린다는 저이들의 비난에 굴하지 않고, 수 년간 반전평화를 외쳤다. 나카자토씨 모습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야코섬에는 2020년부터 미사일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 그곳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안부 추모비 ‘아리랑비’가 세워져 있다. 태평양 전쟁을 겪으며 강화도보다 작은 이 섬에는 3만 여명의 장병들이 배치되었고, 16곳의 위안소가 있었다. 2008. 년 세워진 이 위안부 추모비(아리랑 비)는 미야코에서 착취당했던 위안부들이 빨래를 마치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에 세워졌다. 히로토시라는 미야코 주민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위안부들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땅에 큰 바위를 놓은 것이 현재 아리랑비로 기억되고 있다. 아리랑비는 단순한 추모비를 넘어, 과거와 현재, 지역과 아시아를 잇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과거가 현재를 살게 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아리랑비는 조용히 답하고 있었다.

 

150년 전 일본에 의해 사라진 류큐왕국의 흔적은 미야코의 모든 곳에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음식도 일본의 그 무언가와 조금 달랐고, 노래와 춤, 건축양식과 말투도 일본이라는 호칭이 그들에게 실례됨을 느끼게 했다.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일본 내 미군기지의 70%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오랜 고통을 방증한다. 수 십년간 강대국의 갈등에서 그 방패막이 역할을 강요당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 반도 주민들의 처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일본 헌법 제9조는 군사를 보유하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평화주의를 선언하고 있고,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기 위해 지역 주민들은 미야코 시내에 헌법 제9조의 내용을 기재한 비석을 세워두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사회대개혁을 외치는 이 시기에도 미·중 갈등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평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고민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운동이라며 조금씩 대중운동에서 흐려지고 있고, 통일운동의 구호은 구시대의 언어로 치부되기도 한다. 국제연대활동으로 우리와 그들의 반전운동이 다시 힘차게 살아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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